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프 톨스토이 (문단 편집) === 말기 작품과 최후 ===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나보코프]]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있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제임스 조이스|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작품은 애먼(?) [[대천사]] 미카엘을 끌어들였다. '[[천사]]=[[미카엘]]'이라는 인지도 때문이었지만...]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등의 단편 소설들을 썼으며 국내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으로 다른 톨스토이의 걸작 장편들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다만 후기 톨스토이 작품들은 [[과학]]과 [[교회]]를[*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 [[악마]]의 발명이라고 조롱하는 등의 서술로 인해 전기 작품들에 비해서 홀대되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이 아주 강했는데,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면모를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다. 때문에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 와 <[[악마]](1889)>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했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 낙원]]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난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동음이의어)#레프 톨스토이의 소설|부활]](1899)>이다.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부활>의 인세로 지원했고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계 캐나다인]] 문서 참고), 같은 시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라는 수필을 써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여 정교회에 찍히고 말았다. 두호보르파는 캐나다와 조지아 남부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54117|캐나다로 이주한 두호보르파 관련 글]]. 이후,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 대문호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톨스토이의 비판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수위가 강했다. 단편 <지옥의 패망과 부흥>에서 교회를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였고, <부활>에서는 [[성체성사]]를 마술이라고 조롱하였다. 때문에 정교회에서 파문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이런 면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옙스키]]와 대비된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당시 러시아의 악과 싸우고 있던 셈이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전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 그대로의 작품만 본다면 절대 졸작이라 평할 수 없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내공 아니고선 쓸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하지 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 시절에 만난 [[아바르인|아바르계]] [[무슬림]] 전사, 하지무라드 훈자카사(ХӀажимурад Хунзахъаса, [[1818년]] ~ [[1852년]] [[5월 5일]])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서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야와의 갈등은 점점 격해져만 갔다. 종교적인 평론을 쓰거나 복음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동안은 아직 참고 있던 부인이나 자식들도, 그가 귀족 지주의 생활 양식을 버리고 농민과 같은 생활을 시작하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가족 중 딸 알렉산드라만이 유일하게 그를 이해해 주었을 뿐이었다. 소피야는 특히 톨스토이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Vladimir_Chertkov|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와 사이가 나빴다. 그 갈등의 근원은, 톨스토이는 모든 저작권과 판매료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고 소피야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1910년 10월 29일 아침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여행]]--가출--을 떠났으나,[* 사실상 가출이라고 봐야 한다.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쪽지를 남기고 사전에 알리지 않은 채 방랑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11월 7일 '아스타포보 역'이라는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스타포보 역은 1918년에 톨스토이를 기리기 위해 '레프 톨스토이' 역으로 개칭되었다. 이 역은 2014년에 [[폐역]]되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남아 있고, 이 역사에는 톨스토이가 사망한 시간인 6시 5분으로 맞춰진 시계가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위인전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동사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다음의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Но крестьяне… Как умирают крестьяне?» >'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농민들을 찬양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귀족의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가, 드디어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죽게 되었으니, 이를 한탄했다는 것. ''''내가 지금이라도 농민이 되겠다고 나왔는데 이리 죽게 생겼으니, 죽는 순간이라도 농민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농민으로 죽은 거라고 할 수 있는 거냐?''''라는 뜻. 죽어서라도 농민이고 싶었던 톨스토이의 한맺힌 심정이 담겨 있다. [[https://www.theguardian.com/books/gallery/2010/aug/03/authors-last-words-death|#1]][[http://izquotes.com/quote/352561|#2]][[http://www.successories.com/iquote/author/302/leo-tolstoy-quotes/1|#3]] 여담으로 농민이고 싶었기 때문인 영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톨스토이의 무덤은 그의 위상답지 않게 묘비도 없이 매우 단촐하기 그지없다.[[http://1.bp.blogspot.com/-hT7t1U9Wnxo/Upn-FwcCUGI/AAAAAAAAF_M/tZhw8hWHx3M/s1600/Tolstoy's+Grave+3.bmp|#]] 그는 아내 소피야와 끝내 화해하지 않았고,[* 톨스토이가 사망한 해에 소피야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https://www.chayka.org/sites/default/files/styles/large/public/S_Tolstym_v_Yasnoy_Polyane_za_poltora_mesyaca_do_smerti_pisatelya_1910_0.jpg?itok=NejNN2i2|#]]] 죽기 직전 유언에 아내는 절대로 장례식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당부해 소피야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피야는 죽어서도 남편과 합장되지 못한 채 톨스토이 묘지에서 3km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묘지에 묻혀야 했다. 82세에 폐렴으로 사망한 것과는 별개로 엄청나게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한다. 막내딸인 알렉산드라를 56세의 나이에 얻었으며, 막내아들인 이반을 얻은 것도 나이 60살 때 일이다. 다만 이반은 7살 때 병으로 죽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